버스가 서기 전부터 서울시는 이미 비상수송대책을 만지고 있다. 지하철을 증차하고, 막차를 늦추고, 셔틀버스를 준비한다. 마치 파업이 태풍처럼 피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라는 듯이. 하지만 이번 파업 위기는 날씨가 아니다.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만든 손에는 노조와 사용자만 있는 게 아니다. 서울시도 있다.
15일 조정이 불발되면 16일 첫차부터 7천여 대의 버스가 멈춘다. 8개월 전과 똑같은 이유, 똑같은 각본이다. 지난 1월 이틀간 서울의 발을 묶었던 그 싸움을, 노사는 밤샘 협상 끝에 임금 2.9% 인상과 정년 65세 연장으로 봉합했다. 그런데 그 합의는 해결이 아니라 유예였다. 아홉 차례 교섭에도 좁혀지지 않은 간극을 보면, 노사는 애초에 이 문제를 풀 생각이 없었던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그리고 그 의심의 배경에는, 이 싸움의 진짜 셈법을 쥔 제3의 당사자가 있다.
1. "176시간 확정"이라는 말, 정직한가
노조는 지난 4월 대법원이 동아운수 사건에서 176시간을 인정했으니 이미 '확정'됐다고 말한다. 임금 교섭과 분리해 당장 이행하라고 요구한다. 절박함은 이해하지만, 이 말은 정직하지 않다. 대법원 3부는 지난 4월 30일 상여금의 통상임금성은 인정했지만, 연장·야간근로수당을 다시 계산하라며 사건 일부를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파기환송심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게다가 176시간은 대법원이 모든 버스회사에 강제한 숫자가 아니라, 동아운수라는 한 회사가 스스로 맺은 임금협정 속 근로시간을 법원이 확인해 준 것뿐이다. 61개 회사, 3개 회사가 저마다 다른 협정을 가진 마당에 "이미 끝난 얘기"라고 밀어붙이면, 정작 절박한 요구의 정당성마저 의심받는다. 노동자의 권리는 정확한 근거 위에서 더 강해진다.
2. "209시간, 10.32%"라는 숫자놀음
사쪽의 셈법은 더 얄궂다. 파기환송심이 진행 중이라 기준시간이 정해지지 않았다며 209시간을 고수하고, 대신 10.32% 인상안을 제시했다. 얼핏 노조 요구(7.85%)보다 후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다르다. 기준시간을 176시간에서 209시간으로 늘리면 같은 통상임금을 더 많은 시간으로 쪼개게 되고, 시간당 통상임금은 오히려 낮아진다. 인상률이라는 겉포장이 커질수록 실제 손에 쥐는 돈은 작아지는 구조다. 통상임금 산정 기준시간은 법이 일률적으로 못박은 숫자가 아니라 노사가 협약으로 정하는 것인데, 사쪽은 마치 법원이 209시간을 정해준 것처럼 말하며 협상을 미룬다. 법적 불확실성은 협상을 미루기 위한 알리바이가 아니라 서둘러 풀어야 할 이유여야 한다.
3. 그런데, 정작 이 돈은 누가 내는가
여기서 물어야 할 진짜 질문이 있다. 사쪽이 인건비 부담을 이야기할 때, 그 부담을 실제로 지는 것은 누구인가. 서울 시내버스는 2004년부터 '수입금 공동관리형 준공영제'로 운영된다. 버스회사는 운행 실적에 따라 서울시가 정한 표준운송원가를 정산받는데, 이 표준운송원가의 85%에 달하는 운전직 인건비는 실비로 정산된다. 다시 말해 임금이 오르면 그 부담은 상당 부분 버스회사가 아니라 서울시 재정으로 넘어간다. 노조는 사쪽과 협상하지만, 협상 비용의 실제 지급자는 뒤에 있는 서울시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서울시의 재가만 나면 협상이 타결된다"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도 서울시는 이 싸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노사 문제"라 부르며 거리를 둔다. 파업이 임박해야 비상수송대책을 발표하고, 협상이 결렬 직전에 이르러야 뒷문으로 개입한다. 매년 6천억 원대 적자를 시 예산으로 메우면서도, 정작 그 적자의 핵심 원인인 임금 구조 설계에는 책임지지 않으려는 이 태도야말로 가장 날카롭게 지적해야 할 대목이다.
4. 필수노동을 볼모 삼는 구조, 이대로 둘 것인가
버스기사는 새벽부터 밤까지 시민의 이동권을 떠받치는 필수노동자다. 그런데 그 노동의 대가를 둘러싼 다툼은 매년 시민을 볼모로 하는 벼랑 끝 게임으로 반복된다. 노조는 파업권을 쥐고 있지만 그 권리가 정당하게 인정받으려면 근거가 정확해야 하고, 사쪽은 경영 부담을 말하지만 그 부담의 실체가 서울시 재정으로 이전되는 구조라면 "어렵다"는 말로 협상을 미룰 자격이 없다. 그리고 서울시는 준공영제의 설계자이자 최대 재정 부담자이면서, 갈등이 격화될 때만 등장하는 소방수 역할을 자처한다. 표준운송원가에 개정·갱신 조항조차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이 제도는 20년 넘게 방치된 채 갈등을 재생산하는 온상이 되고 있다.
5. 이제는 답해야 할 시간
노조는 '확정'이라는 과장된 언어 대신 파기환송심 결과에 따라 소급 적용하는 잠정합의를 제안해야 한다. 사쪽은 인상률의 숫자만 부풀리지 말고 기준시간 변경이 실제 임금에 미치는 영향을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그리고 서울시는 15일 조정이 열리기 전에, 파업이 임박해서가 아니라 먼저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매년 재정을 대면서도 갈등의 설계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태도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준공영제가 시행된 지 20년이 지났다면, 이제는 표준운송원가 산정 방식과 임금 결정 구조 전체를 다시 짜야 할 때다.
16일 첫차가 정상적으로 출발할 수 있느냐는 노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뒤에서 지갑을 쥐고 있으면서도 얼굴을 감춘 서울시가, 이번에는 먼저 답해야 한다.
<본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수도 있습니다>
[필자 약력]
△강원도 삼척 출신
△건국대학교(행정학과)석.박사
△노동부 총무과(인사 담당)
△노동부 감사담당관실
△국무총리실 조사심의관실(공직 감찰)
△노동부 고용정책실 자격지원과
△노동부 기획조정실 고객만족팀
△노동부 산업안전국 안전정책과
△강릉지방노동지청 근로감독과장
△서울지방고용노동청 강남지청 직업능력개발과장
△서울지방고용노동청 관악지청 근로개선지도1과장
△중부지방고용노동청 원주고용센터 소장
△중부지방고용노동청 태백지청장
△현 노무법인 최상인업 대표공인노무사
저서 : △노동법 강의 △외국인력 정책론 △노동법은 내친구 △산업안전 보건법 해설 △외국인 고용 허가제
논문 : △외국인근로자 유입에 따른 경제적 효과에 관한 연구(행정학석사) △저 숙련 외국 인력의 정책평가에 관한 연구(행정학박사)
△특수형태 근로종사자의 보호정책에 관한 연구 등 다수